
▲ 김해성 作 '사평역에서'
沙平驛(사평역)에서
詩 : 곽재구
작곡 : 유종화, 낭송 : 박종화 작곡 : 김현성, 노래 : 김현성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시집 '사평역에서'(창작과비평사, 1983)
沙平驛(사평역)에서 - 詩 : 곽재구, 작곡 : 유종화, 낭송 : 박종화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시인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1983년 '민족과문학'에 소설 '사평역'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두고두고 기억되거나 애송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작품 만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이 시를 접하는 독자들은 우선 '사평역'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그곳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화순읍에서 고흥 방면으로 가는 국도 제15호선을 따라 15km를 가면 사평리에 이르는데, 정확히는 광주광역시와 인접한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기차역이 없다. 그러니까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으로서 3등 완행열차가 바쁠 것도 없이 쉬엄쉬엄 쉬어가는 80년대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이다.
일찍이 평론가 김현은 곽재구 시인을 "증오의 시인이 아니라 사랑의 시인"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이유는 80년 광주의 현실과 시대적 아픔이 대부분의 시인들을 증오에 휩싸이게 했음에도 곽재구는 그 세계에서 빠져나온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김현은 또 곽재구에 대해 말한다. 따뜻하게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껴안을 때, 그의 시는 빛을 발한다. (곽재구는) 그저 사랑의 시인일 따름이다. 사랑의 시인만이 아름다움은 허름한 가슴에서 나온다라고 믿을 수가 있다.
시 '사평역에서'는 바로 이러한 곽재구의 사랑의 정신이 가장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추운 겨울 밤 대합실에 모여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다 조는 사람들, 감기에 쿨럭이는 사람들의 몸을 녹여주는 톱밥 난로의 불꽃처럼 따뜻한 세상을 그리워하며 한 줌의 톱밥과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줄 줄 아는 시인이야 말로 우리가 소망하는 시대의 상징이 아닐는지.
- 허형만(시인·목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