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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

모란이후 2011. 11. 1. 05:55
 
2005년의 박정희, 박정희의 2005년

죽은지 26년이나 됐음에도 제대로 파묻히지 않은 그를 이제 편안히 장사보내주자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한국현대사
지난 10여일 동안,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박정희란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한-일 협정의 내막을 담은 문서 공개, 문세광 사건 관련 외교문서 공개, 그리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개봉, 그리고 광화문 현판 교체 논란 등은 죽은 지 25년이 넘은 박정희를 다시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에 불러놓았다. 시간이 가면 법에 따라 해마다 많은 문서가 공개될 것이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 범죄를 조사하기 위한 과거 청산 관련 위원회가 국정원, 경찰, 군, 검찰 등 주요 국가기관에서 활동을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다. 이들 위원회가 다루게 될 사안들은 하나하나 폭발성이 아주 강한 사건들이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무궁무진한 인간 드라마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에서 영감을 얻거나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수구언론은 열심히 ‘박정희 일병 구하기’에 나서보지만, 박정희의 딸이란 것 말고는 그 어떤 정치적 자산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잊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냈던 김영삼
왜 박정희는 2005년에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가? 역설적으로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은 김영삼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란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 김영삼은 처음에는 인기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절망은 더 큰 법, 김영삼 말기에 부패와 실정, 그리고 경제난이 겹치자 사람들은 슬슬 박정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집권 진영 내의 대선 후보 경쟁에 나선 주자들은 저마다 박정희를 본받고, 심지어는 ‘아버지’로까지 모셨다. 그리고 도둑처럼 우리를 덮친 외환위기, 박정희 신드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럼에도 1997년의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정권 시기 목숨을 위협받았던 김대중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김대중은 박정희 시대를 청산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청산할 수 없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총구를 거꾸로 들이대고 한강다리를 건넌 군사반란의 2인자 김종필과 손을 잡고 지역감정의 포위를 돌파하면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것이다. 김대중 시절 박정희 유산에 대한 청산이 시도될 수 없었던 것은 이른바 DJP연합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 빨갱이, 거짓말쟁이, 말 바꾸기의 선수 등 온갖 음해에 시달렸던 김대중이 박정희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박정희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처지를 역이용해 박정희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수층 껴안기에 나선 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1961년의 군사반란 이후 18년간 집권하며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가, 죽은 지 또 18년 세월이 흐른 1997년에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대로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죽고 권력을 잡은 자는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전두환이었다. 일찍이 1961년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육사생도의 군사반란 지지 시위를 조직해 박정희에게 강한 인상을 준 뒤, 박정희가 군부 내에 영남 출신 직계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후원한 사조직 하나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등의 경력이 말해주듯 박정희가 양성한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
전두환이 1979년의 12·12와 1980년 5·17의 2단계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뒤 실시한 프로그램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이후 써먹은 수법을 그대로 빼닮았다. 동네에 큰 깡패가 나타나면 양아치들이 평정되듯이, 19년을 사이에 두고 탱크로 무장하고 출현한 이들은 기껏해야 회칼 정도나 들고 다닌 자들 몇몇에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깡패’ ‘불량배’라고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팼다. 그리고 기성 정치인들을 정치정화법으로 발을 묶어놓고, 자신들은 정보기관을 이용해 사전조직을 통해 공화당과 민정당을 조직했다. 구 정권의 실력자나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강탈한 것도, 그리고 새로이 등장했다는 ‘신악’(新惡)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악’(舊惡)을 찜쪄먹은 것도 그대로 닮은꼴이었다.

△ 5 · 16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들과 함께한 모습. 가운데 권총집을 어깨에 두른 박정희가 보인다. (사진/ 실록 군인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박정희가 친위부대로 육성한 군벌들로서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들이었다. 족보도, 일의 솜씨도 그대로 박정희를 빼닮았음에도 전두환 등은 마치 자신들이 박정희와 무관한 것처럼 행세했다. 규제의 상징이던 야간 통행금지는 해제되었다. 길거리에서 경찰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박정희 시대와는 달리 전두환은 교복 자율화를 실시했다. 검열자들이 보기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금지곡을 남발하던 박정희 시대와 결별이라도 하듯 여의도 광장에서는 ‘국풍81’이라는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졌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를 잊어달라고 하는 것처럼, 그 시절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 전두환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박정희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박정희가 키운 하나회의 군벌들은 박정희, 김종필이 군사반란 이후 자신들의 군 선배들을 고려장 지낸 것처럼, 박정희를 서둘러 묻어버렸다. 그를 죽인 김재규까지.
박근혜가 있건 없건 치러야 할 통과의례
민주화 운동 세력도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박정희를 잊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얼마나 흉악했나? 수백명의 동포를 학살한 자가 대통령이라고 뻐기는 세상에서, 광주의 끔찍한 사진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그런 시절에 죽은 독재자를 상대할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아 있는 독재자를 상대하기도 힘에 부쳤다. 이렇게 아무도 박정희를 제대로 파묻지 못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97년에 되살아났다. DJP연합에 힘입어 등장한 뒤 보수 껴안기에 주력했던 김대중 정권은 되살아난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묻는 대신, 거액의 국고를 지원해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고 했다. 그리고 2002년 말의 대통령 선거를 거쳐 2004년 봄의 탄핵 사태를 겪게 되었다. 탄핵은 당시 <한겨레21>을 통해서도 강조했지만,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2004년 3월18일, 501호). 그러나 수구세력의 탄핵은 시민들의 심판을 받아 4·15 총선을 거치면서 국회의 의석 판도가 급변했다. 이제 과거 청산은 단순히 재야 민주세력의 외침이 행정과 입법 두 권력의 지지를 받는 국가적 과제가 된 것이다.
한편, 탄핵 직후 위기에 몰린 수구세력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였다. 자연히 박정희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좌제를 반대해온 입장에서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박근혜가 역사적 인물 박정희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나 공인으로서의 역사인식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가 헌법에 대한 도전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961년의 군사반란으로 헌법을 짓밟고도 성이 안 차서, 1972년 또다시 헌법을 짓밟으며 유신 쿠데타를 감행한 박정희에 대해서 그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박근혜가 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하면 군법회의에 보내 사형까지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던 박정희 시대의 무시무시한 긴급조치가 떠오른다.

△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졸업 후 2개월간의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 말 일본군 소조복장을 한 박정희. (사진/ 실록 군인박정희)
한나라당이나 수구언론은 현재 박정희에게 쏠리는 관심이 마치 박근혜를 흠집 내기 위한 정치공작인 것처럼 비판하지만, 사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과거를 극복하고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대한민국이 박근혜가 있건 없건 반드시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다. 지금 박정희 시절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동안 수구세력은 있는 힘을 다해 박정희 시대를 미화해왔고, 냄새나는 것은 기를 쓰고 덮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힘이 다했다.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면 꼭 누가 때리거나 옆구리를 간질여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가 막아주었고, 전두환 시절에는 전두환의 악행이 막아주었다. 노태우와 김영삼 시절, 박정희는 잊혀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김영삼 말기부터 수구세력은 박정희를 불러냈고, 김대중 시절에는 아예 기념관을 짓겠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러니 박정희에 의해 얻어맞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이 가만있을 수 있는가? 1997년부터 친다면 근 8년 가까운 시절을 잘 버텨왔지만, 이제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어졌을 것이다.
수구세력이 박정희 문제와 관련해 기진맥진하게 된 것은 변화하지 않고 진보하지 않는 수구세력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이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낼 능력도 관심도 없는 수구세력은 박정희의 유산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산을 상속받게 되면 부채도 같이 상속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박정희가 써버린 카드 고지서가, 그가 남발한 약속어음이 만기가 되어 정신없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수구세력은 뒤늦게 전열을 정비해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몰아붙이지만, 하필 빌릴 것이 없어 일본의 극우파 용어를 베껴와야 하는가? 아무리 박정희가 일본식 민족주의자요, 그의 발전 모델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모델, 특히 만주국 모델을 닮았다 하더라도, 그를 미화하는 것까지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빌려와야 하는가?
경제발전 칭찬하려면 우간다와 비교해야
박정희 찬양론의 핵심은 경제 성장이다. 만약 우리가 경제만 잘되면 다른 것은 볼 것 없다는 경제 지상주의에 기대 박정희의 군사반란과 헌정질서 파괴, 인권유린과 정보정치를 용인한다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어디 일제뿐이랴. 히틀러도, 스탈린도, 무솔리니도, 심지어는 김일성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거두지 않았던가? 박정희는 그야말로 경제 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것은 경제가 중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짓밟고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는 일을 꿈꿀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서구의 사상이자,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경멸하는 일본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경멸했다.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는 성장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도 성장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 박정희 생가 근처 구미 초등학교의 새마을운동 기념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국헌 문란의 죄를 사해준다는 조항은 형법 어디에도 없다. (사진/ 류우종 기자)
박정희는 3선개헌을 하면서, 유신을 하면서 안정이냐 혼란이냐를 선택하라고 강요했지만, 정말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은 같이 추구할 수 없는 목표였을까? 근대화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많은 나라들, 특히 공산주의 국가들은 단기적인 강제 동원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금 길게 보면 그 성과를 이어간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 경제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박정희식 경제 모델의 파탄이 아니었을까?
한-일 협정 관련 문서의 공개는 이미 최근에 알려진 내용이지만, 참으로 속이 쓰리다 못해 아리다. 이런 속을 달래느라 사람들은 ‘모르는 게 약이다’란 말을 만들어둔 게 아닐까? 유상, 무상에 차관까지 합한 8억달러. 박정희는 왜 겨우 그 금액을 받아내려고 청구권 문제를 그렇게 서둘러 포기했을까? 경제가 어려웠다는 말로 변명하지는 말자. 경제가 어려웠다면 이승만 시대도 어려웠다. 김일성이 다스리는 북인들 경제가 어렵지 않았겠는가? 이승만도 받지 않았다. 김일성도 받지 않았다. 냉전 문제가 걸려 있던 김일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승만은 왜 일본과 그런 조건으로 한-일 협상을 마무리지으려 하지 않았을까?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나름대로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인물이며, 비록 분단을 확정지은 단독선거이긴 했지만,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절차적 정통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박정희식으로 경제 발전에서 빠른 성과를 거두어 국민들을 달래는 데 목을 매야 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정통성 있는 정부를 총칼로 뒤엎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일단 급전이 필요했다. 조건은 상관없었다. 정권의 이해관계 때문에 급전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민족의 역사도, 피해 당사자인 개인의 권리도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독도 문제가 한-일 협상의 걸림돌이 되자 김종필이 “그까짓 바위섬 폭파시켜버리자”고 망언을 한 것도 정통성 없는 정권의 주역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생활이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
적어도 올 한해는 박정희 문제로 계속 시끄러울 전망이지만, 사실 지금의 20대나 30대는 박정희를 잘 모른다. 지금의 20대에게 박정희 시대는 시간상 지금 40대에게 이승만 시절만큼이나 먼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박정희의 인간성이니, 청렴성이니 하는 것이 터무니없이 미화되곤 한다. 박정희의 사생활을 아주 살짝 다룬 <그때 그사람들>을 두고 논란이 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박정희의 사생활, 영화 속의 대통령이 직접 말하는 일본 속담이지만, 사내의 배꼽 아래의 일을 갖고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박정희 자신이 누구를 크게 봐줄 때, 예컨대 박정희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정인숙 사건과 관련해 당사자인 모씨를 봐줄 때라든가, 야당의 2세 정치인인 모씨에 관한 첩보가 올라왔을 때 실제로 박정희는 이런 말로 보고를 덮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는 의원들의 약점, 특히 여자 문제를 캐어 협박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이병린 변호사는 중앙정보부의 회유와 협박을 단호히 거부했다가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간통죄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 말년의 박정희. 유신 이후 후반기로 가면서 그는 급속돌 망가져갔다. (사진/ 국가기록원)
반란의 주범 박정희가 최고권력자였던 시대는 불행하게도 그의 일거수일투족뿐 아니라 표정과 기분까지도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지닌 시대였다. 그의 사생활이 평범한 개인의 사생활처럼 보호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사생활은 이미 권력게임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가 측근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는 권력의 풍향계였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되어 민주적으로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라면 그의 공적 활동과 사생활은 엄격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다시 한번 헌법을 짓밟고 절대권력자가 되었을 때 공과 사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권력의 사유화, 인격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여자를 조달해야 하는 불행한 시대에 독재자의 사생활은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었다.
정보장교 출신의 박정희가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등 다른 정보장교 출신들과 나라를 주무른 18년은 큰 정치가 실종되고, 정보와 약점 캐기, 조작에 기초한 정치공학만 만발한 시대였다. 박정희교 신자들은 박정희를 가리켜 용인술의 천재라고 찬양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용인술이란 정보와 공작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 용인술에 기대어 권력을 적당히 위임했다가 거둬들였다 하면서 정권을 관리해갔다. 박정희의 용인술의 핵심은 자신의 측근 몇몇에게 권한을 위임해주고, 그들을 서로 경쟁시키며 감시하게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식 모델이 외환위기로 성수대교처럼 무너져버렸듯이, 그의 용인술도 박정희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파국을 맞았다. 용인술의 천재라는 박정희가 자신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왼팔인 경호실장, 그리고 술친구인 비서실장과 술을 먹다가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살된 것이다.
그날 그 비극의 현장에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은 박정희 이하 죄다 정보장교 출신들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보안사령관도 지낸 인물이고, 김계원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공수부대 출신이지만, 경호실장이 된 뒤 김재규와 충성 경쟁을 벌이며, 전두환의 처삼촌인 헌병감 출신 이규광을 책임자로 하는 독자적인 정보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10·26 사건도 권력의 최고 상층부 내에서 중앙정보부 대 중앙정보부를 견제하기 위해 직제에도 없는 비선 정보조직을 만든 경호실간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박정희는 권위주의와 정보정치 속에서 판단력이 무뎌졌고, 그의 용인술 줄타기는 파국을 불러왔을 뿐이다.
다른 악명높은 독재보다 부드러웠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그 권력의 악랄함으로 친다면 이디 아민의 우간다나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같은 나라, 또는 피노체트의 칠레 등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기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의 수는 이런 나라에서 피살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수와 견주어볼 때 현격하게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정희 시기에도 보면 의문사 사건도 있지만,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처형이나 인혁당 사건에서와 같이 반대파의 생명을 빼앗을 때도 일정한 법적 절차- 그렇기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 를 밟으려 한 사례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이 박정희 독재가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악명 높은 독재들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 차이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이 출발한 역사적 조건의 차이라 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 학살로 인하여 한국 사회에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꿔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 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비록 4월혁명을 거친 뒤이기는 하나, 일반대중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길들여져 있는’ 상황에서 출발했다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집권 기간에 시민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여러 차례 군을 동원해야 했고, 집권 말기에 가서는 긴급조치와 같은 극도의 강압적 조치가 상시화돼 있었다. ‘긴급’조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발동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발동돼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동안 긴급조치, 계엄령, 위수령 등이 발동됐던 기간은 무려 105개월이나 되었다. 박정희는 빈번히 군을 동원하고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군법회의에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비상대권을 휘둘렀지만,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거나 집단 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재권력 입장에서 한편에서는 총칼을 실제로 사용할 필요성이 적었던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또다시 대규모로 거리에서 피를 흘리는 상황을 피하려는 나름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데 유신의 마지막 나날에 가서는 나름대로 지켜지던 자제 규율이 양쪽 모두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민간인 학살은 완벽하게 잊혀진 사건이 되었고, 1960년의 4월혁명 당시의 유혈 사태조차도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갖지 못한 당시의 학생들은 이 정권이 총을 쏠 수 있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독재권력은 독재권력대로 ‘겁을 상실’한 학생들을 다시 길들여야 했다. 1975년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 살인도 별로 약효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살해당하기 직전, 유신정권 내부에서는 부산과 마산의 학생시위가 폭력시위로 발전하자 군대를 동원해서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강경론이 대두되었다. 10·26 사건이 일어나던 날 저녁, 당시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하던 박정희의 경호실장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명을 학살하고도 문제없었다며, “부마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경우, 탱크로 한 200만~300만명만 깔아죽이면 잠잠해진다”고 호언했다. 김재규는 이런 분위기를 들어가며 자신의 박정희 살해가 대규모 유혈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의거였다고 정당화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정권의 종식을 가져왔지만, 대규모 유혈 사태를 방지할 수는 없었고 다만 6개월가량 연기시켰을 뿐이다. 그리고 장소가 영남의 부산 또는 마산에서 호남의 광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국헌 문란의 수괴가 아닌가?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정말 우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박정희 시대에 민주주의가 그립다고 말하다가 중앙정보부의 지하실에 푸줏간의 고깃덩어리마냥 매달려본 사람들 앞에서는 제발 박정희 시대가 그립다는 말은 삼가주었으면 한다.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은 오늘의 기준으로 그 시절을 평가하지 말자고 한다. 좋다. 그런데 박정희가 한 짓, 다른 나쁜 짓 제쳐놓고 총 거꾸로 들고 민주정부를 뒤엎고 헌법을 두번씩이나 짓밟은 것은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국가보안법은 봐주고, 형법을 적용한다 해도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형법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이라 함은”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박정희,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지른 국헌 문란의 수괴 아닌가? 형법 어디를 찾아봐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면 그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없다.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여자관계에서 ‘기자 박치기’까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와 김재규쪽 변호사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독재자’와 ‘영도자’ 사이에 ‘인간 박정희’가 있다. 그의 정치적 행위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진영이 극단적 평가를 내리듯,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그의 독재에 맞섰던 사람들은 “교활하고 야비한 냉혈한”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미 넘치고 서민적 풍모를 지닌 진정한 영웅”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과연 ‘인간 박정희’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여성편력으로 자식들에게 약점 잡혀
‘인간 박정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중 가장 입길에 오르는 것은 그의 여자관계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두 여인의 술시중을 받았던 사실이 말해주듯, 말년에 그의 여자관계에 대한 추문은 사그라지는 권력과는 정반대로 무성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는 여러 ‘사실’과 ‘추측’이 뒤섞여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박정희가 유신 말기 무렵 여성을 동반한 술자리를 자주 가진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증언은 김재규 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의 법정 진술이다. 10·26 재판 녹취록(<대통령의 밤과 여자> 김재홍, 1994년 발간)에 따르면 1979년 12월11일 열린 10·26 사건 1심 재판(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박 과장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의 ‘안가’(안전가옥) 담당 직원들 사이에서 “대통령만 참석한 행사는 소행사,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 중정부장이 참석하면 대행사라는 용어를 쓴다”는 등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한 증언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과장은 10·26 현장에 있었던 두 여인에 대한 진술을 시작하기 직전에 김 부장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 박 과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는 지난 1월27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과장이 여인들에 대한 질문에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 김 부장이 ‘야, 애기하지 마’라고 뒤에서 가볍게 소리쳤다”며 “그러자 박 과장은 움찔하더니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망중한을 즐기는 박정희 대통령. ‘인간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린다. (정부기록사진집 7권)
그러나 박 과장은 항소심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해 1심 때보다 상세한 진술을 한 것이다. 1980년 1월23일 열린 고등군법회의 2차 공판에서 박 과장은 ‘대통령의 여인’들에 대해 “지금도 수십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박 과장은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는 좀더 충격적인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각하께서 평균 한달에 열번 (궁정동 안가에) 나오셨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온전하게 끝나지 못했다. 법무사(당시 군사법정의 판사)가 “재판과 관계없는 내용”이라며 그의 진술을 제지하고 나섰다.
당시 변호인단은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을 주요 변론 전략 중의 하나로 삼았다. 강 변호사는 “접견 때마다 김 부장에게 여자관계를 물었지만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며 “이른바 ‘채홍사’ 구실을 한 박선호 과장도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변호인들은 피고인 접견을 통해 ‘여인’들의 이름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강 변호사가 접견(1980년 1월15일) 내용을 기록한 노트에는 ‘여자 연예인 100명’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신인급에 속한 유명 여자 탤런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강 변호사는 “김 부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지만, 겨우 ‘한 100명쯤 된다’는 얘기만 한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유신 말기 무렵 박정희의 여성 편력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많다. 그 내용도 ‘로맨스’부터 추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975년부터 3년간 <서울신문>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 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가 문제가 됐었다. 주변에서 박 대통령을 재혼시키려고 애를 많이 쓰기도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근혜와 구국여성봉사단의 잡음
이런 ‘약점’은 박 대통령이 근혜씨와 지만씨를 둘러싼 ‘잡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원인이 됐다. 근혜씨는 당시 최태민 목사(사망)와 함께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총재를 맡은 최 목사가 각종 비리에 연루돼 큰 문제가 됐다. 그러나 근혜씨가 관여한 단체라는 이유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김 부장이 재판 당시 제출한 ‘항소이유 보충서’에는 당시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김 부장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건의에 따라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한 뒤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근혜씨를 불러 직접 ‘친국’을 한 뒤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파악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여성·종교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한수씨는 “구국여성봉사단은 당시 굉장한 조직이었다. 사실상 퍼스트레이디인 근혜씨가 관여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모였다”며 “근혜씨 때문에 청와대에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제기한 비서관은 사표를 써야 했다”고 회상했다.
최 목사는 5공화국 출범 직후 비리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풀려났다. <한겨레21>은 최 목사의 혐의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해 8월 국가기록원에 수사기록 공개를 요청했으나, 국가기록원은 “보존 기간이 지난 문서로 현재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 김재규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왼쪽)와 1975년부터 3년간 일간지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사장. (사진/ 김진수 기자)
김 부장은 지만씨 문제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장은 항소이유서에서 “지만군은 2학년 때부터 육사 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녔다. 박 대통령에게 육사의 명예나 본인의 장래를 위해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거나 외국 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한수씨는 “지만씨 문제는 (청와대에서) 당시 부잣집 자제들 사이에 만연된 일종의 낭만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추종자들과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돼 있다. 그를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지난 1971년 프로권투 헤비급 타이틀전 무하마드 알리-존 프레이저 경기 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좋은 사례로 든다. 세계 권투사에 길이 남은 두 선수의 격돌은 당시 국내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끌었는데, 국내 시각으로 한낮에 벌어진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박 대통령은 갑작스레 청와대 기자단과의 점심을 제안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기자실에서 자연스럽게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시 공무원은 근무 규정상 일과시간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규정도 지키고 경기도 보기 위해 짜낸 묘안이었던 셈이다.
70년대 중반까지는 검소한 식생활
박 대통령은 점심을 먹은 뒤 기자실에 돌아와 경기를 함께 보면서 승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제안했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유명세에서 앞선 알리에 돈을 걸었지만 박 대통령은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결과는 박 대통령의 ‘독식’이었다. 프레이저는 15라운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따냈다. 그러나 기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프레이저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었다. 기자들은 박 대통령이 3천원의 ‘상금’을 기자실에 놓고 갈 줄로 예상했으나, 그는 자신의 낡은 지갑을 꺼내 이 돈을 고스란히 집어넣고는 유유히 기자실을 빠져나갔다. 당시 ‘일개’ 국장급에 불과한 공무원들이 기자들을 상대로 ‘접대 고스톱’을 치거나 수시로 촌지를 건네던 관행과 비교되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해본 이들은 그가 특히 먹거리에 있어서 검소했다고 증언한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인 1970년대 중반 청와대는 경제 관련 부처 장관과 재벌총수 그리고 여야 대표 등이 참가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는데, 박 대통령은 회의가 끝난 뒤 점심식사로 우동이나 비빔밥 등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비록 말년에는 요정을 자주 찾았지만, 그의 검소한 식생활은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는 게 추종자들의 증언이다.
박 대통령은 출입기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자주 나눴다. 1974년 육영수씨가 죽기 전까지는 한달에 한 차례 정도 출입기자들과 식사 모임을 했다. 이는 언론 관리와 정보 수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었다. 기자들은 중정 등 박 대통령의 정보 라인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짭짤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정보장교 출신답게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할 줄 알았다. 박 대통령은 기자뿐 아니라 대학교수 등 민간인들과 비공식적 모임을 많이 열었다.

△ 어린이 행사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 그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사진/ 정부기록사진집 6권)
박 대통령은 이런 모임에서 얻은 정보를 고위 공직자를 ‘관리’하는 데 자주 활용했다. 지난 1971년 실미도 사건의 책임을 물어 경질한 정래혁 당시 국방부 장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국방부와 청와대를 동시에 출입하던 한 기자로부터 취재 내용을 자세히 ‘보고’받은 뒤 정 장관의 경질을 결정했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이후락 중정부장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그의 인척이 마포서장으로 있으면서 폭행 사건을 일으켰는데, 피해자의 투서를 본 육 여사의 건의로 박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철저한 조사를 지시한 뒤 그 결과에 따라 마포서장을 파면했다”며 “공직자의 비리를 엄격하게 다스리려는 의지가 강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통령은 장애인 복지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최초의 장애인 재활·복지시설인 정립회관은 박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설립이 불가능했다는 게 관련 인사들의 증언이다. 황연대(67)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부회장은 “당시 정부 관료들에게 장애인 복지 얘기를 꺼내면 ‘성한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장애인 복지냐’며 면박을 주던 때였다”며 “청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정립회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걸리가 시바스리갈로 바뀌기까지…
장애인 복지사업에 대한 청와대의 지원은 영부인의 각별한 관심에서 나왔다. 육 여사 집안에는 소아마비를 앓던 친조카 3명이 있었다. 황 부회장은 “1965년 육 여사의 초청으로 소아마비 어린이들과 함께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육 여사가 자신의 조카 얘기를 꺼냈다”며 “그때는 소아마비 자식을 둔 고위층 인사들이 그런 사실을 숨기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육 여사는 황 부회장에게 20만원을 건넸고 황 부회장은 이 돈으로 정립회관 터를 계약할 수 있었다.
육 여사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립회관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황 부회장은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청와대는 1967년 걸스카우트회관 건립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영화관 입장료의 일부를 떼어내 모아둔 돈을 정립회관 건립에 사용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걸스카우트 총재를 맡고 있던 육 여사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육 여사가 사망한 뒤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도왔다. 1974년 12월 박 대통령은 공사 중단 위기를 맞은 정립회관을 위해 2억원의 ‘하사금’을 내렸는데, 이 돈은 당시 공식적인 대통령 하사금 중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1975년 정립회관 개관식 행사에는 육 여사 대신 박근혜씨가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정립회관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 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갔던 것이다.

“다양한 직업여성 100여명 보유”
[인터뷰 | 전 중앙정보부 안가 관리직원]

△ 박정희가 시해된 궁정동 안가 현장. 청와대와 가깝고 규모가 커 자주 이용했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10·26의 무대였던 궁정동 안가(안전가옥)는 어떤 곳일까. 안가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박선호 과장은 이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궁정동 안가에 대해 설명을 하려다 법무사의 제지를 받았다. 그의 입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서울에는 궁정동 말고도 5∼6곳의 안가가 더 있다는 것’과 ‘대통령만 이용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당시 안가에서 대통령이 모임을 여는 사실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중정부장만 아는 1급 비밀이었다. 안가 관리를 책임진 의전과장은 중정에서 잘나가는 요직에 속했다. 대통령의 사생활을 다루는 업무의 특성상 승진이 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가는 YS 정권 때 모두 헐렸는데,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21>은 수소문 끝에 70년대 한때 한 안가에서 근무했던 전 중앙정보부 직원을 찾아내 어렵사리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안가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
원래는 대통령 경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 술자리를 하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곳이다. 10·26 사건으로 여성이 접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안가의 운영 목적이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다. 외국에서도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안가를 운영하면서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청와대 경호실이 아니고 왜 중정에서 직접 관리했나.
경호실은 군처럼 경직된 조직이어서 안가 관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대통령도 딱딱한 분위기에서 술자리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아 중정에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공식적인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함으로써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주변 권력의 분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대통령은 안가를 돌아가면서 이용했나.
10·26이 난 궁정동이 가깝고 규모가 커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머지 안가 가운데는 아예 가지 않은 곳도 있다.
연회 접대 여성은 어떻게 준비하나.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처럼 여자들을 합숙시키는 곳은 없었다. 여자들을 조달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마담’들을 활용했다. ‘손이 컸던’ 마담 2명 정도가 주거래처였는데 그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100여명씩 보유하고 있었다. 마담들이 추천하면 중정 직원이 ‘면접’을 봤고 외모와 경력 등을 따져본 뒤 입이 무거울 것으로 보이는 여성 위주로 선택해 수발을 들게 했다.
연회 원칙 같은 것은 없었나.
술과 음식은 경호실에서 선택하고 준비까지 책임진다. 안가에는 조리시설이 있었지만 모든 음식 재료는 경호실에서 준비해온다. 접대 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대통령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대통령이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대통령이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1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
안가에서 대통령은 주로 누구를 만났나.
무척 다양해 특정할 수 없다. 수출을 많이 했거나 해외에서 큰 공사를 수주한 기업인을 불러 격려하기도 했고,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 학자 등을 불러 얘기를 듣기도 했다. 고인이 된 한 그룹 총수와 자주 접촉했는데, 그 총수는 대통령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지원을 부탁해 기업을 눈부시게 키워나갔다.
안가 관리자들의 근무 형태는 어떠했나.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 청소를 비롯한 관리 상태는 항상 최상을 유지해야 했다.


내 얼굴이 왜 새까만 줄 아쇼?
[인터뷰 | ‘청와대 출입’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현재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박 대통령이 여러 과오를 저지르긴 했지만 빈곤 문제를 해결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다.
그가 기억하는 박 대통령은 매우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한번은 기자들에게 ‘내 얼굴이 왜 새까만 줄 아쇼?’라고 묻는 거예요. 다들 ‘모른다’고 했더니 씩 웃으시더군.” 박 대통령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조카와 출생연도가 같다. 그의 어머니가 큰형수와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한 것이다. “박 대통령 대답이 이래요. 어머니가 창피해서 자기를 지우려고 간장을 많이 드셨다고. 그래서 자기 얼굴이 새까맣게 됐대요. 그 얘기를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라구.”
박 대통령의 소탈한 성격은 그를 비난하던 기자들도 ‘박정희 장학생’으로 변신하게 했다고 한다. “사석에서 박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했던 동료 기자가 청와대를 출입해서 박 대통령과 딱 3번 같이 식사하더니 그냥 박정희 팬이 돼버렸어. 당시 청와대를 거쳐간 기자들 중 나중에 유정회(박 대통령이 유신을 단행한 뒤 직접 임명한 국회의원) 의원이 된 기자가 7∼8명가량 됩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이 친일이나 엽색 논란으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배꼽 아래 얘기는 하지 말라’는 얘기가 돌 땝니다. 특히 군인 사회에서는 그런 문화가 심했죠. 박 대통령도 그런 문화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지금 잣대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당시에는 불륜은 문제가 됐지만 ‘로맨스’는 용납되던 때였어요.” “친일 논란도 마찬가지죠. 한-일 합방 이후에 태어난 사람에게 독립운동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겁니다. 물론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크게 대우해줘야 하지만. 박 대통령이 만주군 장교로 가게 된 것도 돈이 없어서 그런 건데, 1943년에 임관해서 45년에 중위가 됐어요. 해방되던 해 비로소 장교가 된 겁니다. 40년 이후에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왜곡된 겁니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박정희 지시”
[인터뷰 | 제임스 시노트 신부]

△ 제임스 시노트 신부.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결국 1975년 12월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사진/ 류우종 기자)
제임스 시노트(75·미국) 신부는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 집행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75년 3월 국제앰네스티 관계자들과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 등 미 의회 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JP(김종필씨 애칭)는 앰네스티 관계자 등에게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결코 사형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간 지 8일 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프레이저 의원 말로는 JP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죠. 당시 JP의 말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박정희밖에 없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구명을 위해 박 정권에 대항하다 75년 12월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1960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정치적 혼란이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에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환영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인 신부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박정희가 3선 개헌을 강행하자 그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다면 민주화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군사정권이 장기 집권했던 칠레나 브라질은 지금 과거사 청산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왜 한국은 아직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나요?”


박정희와 정인숙, 그리고 정일권
[인터뷰 |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관련해 당시 신문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그는 “정일권 총리가 누명을 뒤집어쓴 대가로 복권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사진/ 김진수 기자)
박정희의 여자관계가 거론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정인숙 사건이다. 정씨는 1970년 자신의 오빠에게 피살됐는데(당시 정씨는 26살이었다), 그의 ‘연인’이 정일권(1994년 사망) 총리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됐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도 많다.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정인숙의 연인이 정 총리였다는 것을 당시 박 대통령 측근들이 퍼뜨리고 다녔다”며 “나도 당시 박정희의 한 측근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위원장은 “정 총리는 당시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난 상태였는데, 정인숙 사건을 계기로 다시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됐다”며 “세간에는 정 총리가 누명을 뒤집어쓰는 대가로 복권됐다는 얘기도 돌았다”고 말했다.
당시 정인숙의 아이는 박 정권과 유착관계에 있던 한 일본인 재력가에게 잠시 맡겨졌다가 외가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정씨의 오빠는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뒤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임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유신은 해선 안되는 것이었다”
[인터뷰 |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

△ (사진/ 이용호 기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박정희 집권 시절 <조선일보> 정치부 국회출입 기자와 정치부장을 했다. 최 전 대표는 1월26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시대에 대해 “가난 탈출 과정은 경이로웠지만, 유신은 절대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가 내걸었던 국가 재건은 지식인이나 언론인 사이에서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박정희에 대해 기자들의 평가는 어땠나.
우리는 참담한 가난의 기억을 가진 세대 아니냐. 인권 탄압한 것도 사실이고 쿠데타로 집권한 것도 사실이다. 정치나 관료 세계가 부패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이션 빌딩(국가 건설)의 시대였다. 왜 민주주의 제대로 하지 않나 하는 것보다는 가난 탈출 과정을 놀라운 눈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강했다.
개인적으로 본 박정희는.
집념이 대단해 보였다. 경부고속도로 절개면까지 직접 그린 사람이다. 밤잠도 안 자는 것 같았다. 경부고속도로 놓는다고 할 때 찬성자는 대한민국에서 딱 둘뿐이었다. 박정희하고 정주영. 장기영 부총리를 위시해서 온 국민이 반대했다. 당장 굶어죽는 사람이 천지인데 자가용 가진 사람 유람길 닦나 이랬다. DJ가 국회에서 4시간 동안 반대 연설을 했는데 명연설이었다. 결국 여당 의원들이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고속도로 밀어붙여 닦고 새마을운동 시작하더니 그 다음 단계로 공단, 항만 세우면서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더라. 일본에서 종자돈 얻어다 포철 세우고 길 닦고, 차관으로 공장 세워 온갖 물건 내다팔고, 경공업·중화학공업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은 경이로웠다. 그때부터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통치 방식을 평가하자면.
생각을 많이 하고 나라를 어떻게 하면 바꿀까 혼신을 쏟아붙는 스타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술하고 여자. 육 여사가 재떨이 던졌다는 얘기는 파다했다. 뒷세대 눈에는 괴물이나 독재자로 그려지겠지만 국가 발전 과정에는 그때만의 상황이 있다는 걸 그때의 시각으로도 봐야 균형이 잡힌다. 그런데 삼선개헌까지는 그렇다 쳐도, 유신은 그거 나라 조지는 거였다. 안 했어야 했다. 좋게 보면 내이션 빌딩 완수하려고 그랬겠지만 다르게 보면 독재자의 길로 스스로 둥둥 떠서 간 거라고 볼수 있다.
정치 환경은.
그 시절에 부패는 없었다고 하지만 흥청망청했던 건 맞다. 어느 정도였냐면 유력 정치인이 내게 친구들이랑 술 먹으라고 촌지 수표를 줬는데 엄청난 거액이었다. 그래서 이 양반이 잘못 준 건가 해서 다음날 돌려주러 갔더니, 지갑에서 그런 큰돈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고 있더라. 정치인들 돈 펑펑 쓰고 계보 만들고 그랬다.
10·26 사건 때는 어땠나.
죽을 사람 죽었다는 생각은 솔직히 없었다. 남북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박정희 혼자 원맨쇼 하면서 끌고 간 나라였는데 걱정이었다. 전두환이 국보위 만들어 나라 들어먹은 게 큰 굴절이었다. 10·26 직후 정부가 관리를 잘해서 민주주의 선거를 했어야 했다. 그걸 막아버린 게 국보위였다. 정말 큰 굴절이었다.
 
2007년 대선의 최대쟁점 될 수도…

△ 당 운영위원회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왼쪽)와 원희룡 최고위원. ‘박정희 과거사’는 당내는 물론 대선 본게임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쓰나미’ 밀려오는 한나라당
‘계승론’과 ‘절연론’의 맞대결은 당내 대권게임의 전초전
앞으로 당분간 한나라당의 최대 화두는 단연 ‘박정희’가 될 것 같다. 10·26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 사건과 한-일 협정 문서 공개, 박 전 대통령의 광화문 현판 교체 등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련의 ‘과거사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는 탓이다.
‘박정희 화두’의 내용은 간명하다. 한마디로 “박정희를 계승할 거냐, 아니면 박정희와 절연할 거냐?”를 중심으로 세가 갈리는 것이다. 어중간한 세력들도 점차 이 물음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시대의 유산을 두둔할 것인가
초기 양상은 이미 현실에 나타나고 있다. 대구 출신인 강재섭 의원은 1월26일 당 회의에서 “노 정권은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미명 아래 역사에서 쓰레기만 찾아내 역사를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정희 엄호부대’를 주저 없이 자임한 것으로, 바탕에는 대구·경북 정서도 깔린 듯했다. <그때 그 사람들> 시사회에 참석했던 이계진 의원은 “표현의 자유를 나무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자유를 어느 한쪽, 그것도 약자 죽이기에 쓴다면 그것은 잔인한 방종”이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 역시 ‘박정희 대변인’ 대열에 가세했다.
반면에 홍준표 의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이 5·6공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잘 안 되는데 게다가 3공화국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느냐”며 최근 상황에 대해 위기감을 표시했다. 홍 의원은 “박근혜 대표가 당의 간판으로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3공의 부담을 안고 공격받아야 한다”며 “마치 이회창 총재 시절에 그의 아들 병역 문제, 빌라 문제 때문에 한나라당 전체가 병역비리당인 것처럼 도매금으로 엮였던 때와 흡사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임태희 의원도 “한나라당은 3공을 정면으로 들어내고 만들어진 정치세력의 계승자임에도 박근혜 대표 때문에 자꾸 3공과 연결되고 있다”며 “홍 의원의 주장에 동감하는 대목이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계승론’은 대구·경북 의원들과 박 대표 2기 체제의 당직자들 사이에 우세한 편이다. 박 대표와 가까운 한 당직자는 “이 밖에 당내의 ‘말 없는 다수’ 세력이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에 ‘박정희 절연론’ 또는 ‘박정희와 거리두기론’은 홍준표·김문수·이재오 의원이 이끄는 국가발전전략연구회, 원희룡·남경필·정병국 의원 등의 소장파 수요모임, 임태희 의원 등의 푸른정책연구모임 회원들 사이에서 우세하다. 이들은 수도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개혁적 보수’ 노선을 표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용갑 의원과 함께 자유포럼을 이끄는 이방호 의원도 이 대목에선 “한나라당이 박근혜 대표를 의식해서 박정희 시대를 자꾸 두둔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자유포럼은 ‘국가보안법=안보적 가치 수호’를 정체성으로 내세우지만, ‘3공 수호’에까지 몸을 던질 이유는 없다는 입장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 ‘박정희 논쟁’은 필연적인 것으로 진작 예상돼왔다. 박근혜 대표의 정체성과 직결되어 있는 탓이다. 완벽하게 등치시키긴 어렵지만 ‘친박정희=친박근혜’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다만 이 논쟁은 2007년 초 대선후보 당내 경선 국면에서 전면화될 것으로 보였는데, 좀더 빨리 현실화되는 게 지금 한나라당의 모습이다.


△ 홍준표 의원은 박정희의 유산과 절연하자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한나라당이 5·6공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잘 안 되는데 게다가 3공화국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느냐”고 말한다.


차기, 차차기를 노리는 주자들
‘박정희 논쟁’이 이렇게 일찍 가시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논쟁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첫째로, 최근의 논쟁이 여권의 과거사 드라이브 때문에 촉발된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일부 있다. 박 대표는 애초 “내 입으로 아버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말하지 않아도 대중들이 스스로 ‘아버지의 자산’을 기억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내보여줄 듯 말 듯하는 일종의 ‘실루엣 정치’를 펼쳐왔다.
그러나 정수장학회 이사장 문제가 불거지고, 이에 박 대표가 적기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의 부담’에 얽히기 시작한다. 박 대표가 지난해 말 4대 입법 처리 국면에서 강성 태도를 보인 것도, 비슷한 효과를 낳았다. 당내 개혁파들이 “박근혜로 되겠느냐”라는 의구심을 품을 단서가 제공된 것이다.
두 번째로, ‘박정희 논쟁’ 이면에는 차기 대선전략과 관련된 셈법의 차이가 깔려 있다.
우선 ‘박정희 과거사’가 2007년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는 한나라당 내 주류·비주류의 견해가 일치한다. 여권이 일련의 과거사 드라이브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신 독재의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자신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세력으로 차별화하려는 것으로 이들은 인식하고 있다. 이방호 의원은 “지금 상태로 가면 한나라당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박정희의 자산과 부채를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박정희 계승론자’들은 일시적 우여곡절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박정희의 자산’이 한나라당의 정권 탈환에 플러스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공과 가운데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박정희 향수’를 자연스럽게 타고 가는 게 나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17대 총선에서 위력을 발휘한 ‘박근혜 바람’이 다시 한번 불 것이란 기대도 이들은 하고 있다. 구상찬 부대변인은 “여권의 드라이브 때문에 국민들이 한때 혼란을 겪더라도 결국은 ‘박근혜 죽이기’ 용도라는 정략을 깨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홍준표 의원은 “박정희 향수는 엄존한다”며 “그러나 미래를 향한 선택을 요구하는 대선 상황에서 ‘그 시절이 좋았다’는 복고주의에 기대는 정당은 필패한다”고 주장한다. 홍 의원은 “특히 50~60대 이상 장년층은 몰라도 20~40대는 그런 정치세력을 외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태희 의원도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한나라당에 도움이 될 게 뭐냐”며 “한나라당이 박정희 유산으로 정치적 이익을 얻겠다고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미래정당으로 나아가길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의 세 번째 측면은 당내 대권게임 전초전 성격이다. 대구·경북 의원들과 박근혜 대표 2기 체제 당직자들 사이에선 “차기 대선후보는 박근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상태다. 반면에 홍준표·이재오·김문수 의원 등 국가발전전략연구회쪽에는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지사를 은근히 염두에 두는 사람이 많다. 수요모임을 이끄는 원희룡 의원이나 푸른정책연구모임을 이끄는 임태희·박진 의원 등은 차기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차차기를 고려하며 이미지를 관리한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 1975년 7월 가봉공화국의 봉고 대통령 부부 내한 환영식에 아버지와 함께 한 박근혜. 대중들은 그가 누구의 딸인지 잊을 수 없다.


공동묘지의 평화, 그 대가는…
그렇다면 조기에 달아오르는 ‘박정희 논쟁’(=박근혜 논쟁)은 한나라당의 앞길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까?
현재로선 일단 “과거사 논쟁이 박 대표한테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박 대표가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은 오히려 더욱 높아질 것”(박 대표쪽의 한 당직자)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이유는 간명하다. 3공 과거사 논쟁이 거세질수록 당 밖의 범보수세력은 ‘박정희 가치 수호’쪽으로 결집하게 돼있다. 실제로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은 최근 지면을 통해 ‘가학사관 안 된다’ 등의 캠페인을 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반박정희=반박근혜’ 깃발을 내거는 당내 세력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안티 세력이 곧바로 ‘전쟁 중에 장수의 등에 칼을 꽂으려는’ 분열주의자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세론’의 고착화가 반드시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견해들도 있다. 이를테면 누구도 이회창 총재와 당내에서 맞붙어 이길 수 없었던 ‘이회창 독주 시대’가, 국민들한테 역동성을 잃은 집단으로 비친 전례가 있다는 주장이다. 홍준표 의원은 “한나라당의 현재 상황은 노선 투쟁도 상호 경쟁도 불가능한 가운데 ‘공동묘지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동묘지의 룰’이 유지되는 정치집단은 일반적으로 국민들한테 매력적으로 보이기 어렵다. 일부 정치평론가들도 2002년 대선의 교훈을 그런 점에서 찾고 있다. <한겨레21>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아버지 인기는 상승, 딸에게는?

△ 강원도 삼척시 도계의 탄광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현안에 대해 섬세한 계산을 거쳐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기자들이 불쑥불쑥 돌발 현안에 대해 의견을 물어도 그는 사태가 파악되기 전까지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다. 유신정권 말기까지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할 때 받은 수업의 교훈들을 박 대표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박 대표는 최근 ‘박정희 논쟁’ 국면에서도 교과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는 “내가 누구의 딸인지 잊어달라”며 자신의 내력을 의식하지 말고 한나라당이 의연하게 대처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소감을 기자들이 물어도 “문제 있는 것 아니냐”라는 한마디 외에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법적 대응은 박 대표의 동생인 지만씨가 담당하고 있다. 지만씨는 1월27일치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누나에게 ‘제가 법적으로 대응을 하겠다’고 전화를 걸었지요. ‘알아서 해라’고만 했어요”라며 박 대표와 상의한 사실을 밝혔다. 박 대표 입장에서 볼 때 이 문제를 ‘가족 또는 개인사의 문제’로 보고 당과 분리한 뒤, 동생에게 대응을 맡긴 셈이다.
반면에 한-일 협정 문제와 관련해 박 대표는 적극적인 정책 대응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당시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라며 일본에서 받은 자금을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보상하지 않은 문제를 변호했다. 이어 그는 “2월 임시국회에서 보상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박정희 시대의 자산을 옹호하되, 그에 따른 부채를 현 정부에 넘기는 ‘지략’을 그가 발휘한 셈이다. 피해자 보상 문제는 소요 재원이 막대할 것으로 예상돼 현 정부로서도 적잖이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최근 여론 흐름은 아버지에겐 도움이 되지만 딸이 몸담은 한나라당에는 좋을 게 없는 쪽으로 잡히는 것 같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www.ksoi.org·소장 김헌태)가 1월26일 전국 성인남녀 7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또는 향수도’는 81.8%로 절정을 기록했다(△박 전 대통령이 경제성장 등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느냐 △독재와 인권탄압 때문에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를 물음).
반면에 정당 지지도에선 한나라당이 2주 전 26.3%에서 이번에 25.6%로 소폭 하락 또는 정체 흐름을 나타냈다. 열린우리당 지지도는 2주 전 23.9%에서 이번에 29.0%로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정평가도 소폭 올랐다.
이런 결과는 ‘박정희 추모 열기’는 건재하되,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그 열기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은 적음을 시사한다. 박 전 대통령의 높은 인기에는 ‘정치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대한 평가’ 성격이 담긴 탓이다. 이를테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하면 90% 이상이 나오리라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에 한나라당은 과거사 진상 규명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비친 게 지지율 정체를 초래한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들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선 부담 없이 후한 점수를 매기되, 의도에 정략이 깔려 있든 아니든 관계없이 과거사 진상 규명은 철저하게 이뤄지길 바란다는 이야기다. <한겨레21>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박정희, 그래도 경제는 잘했다?”…오해와 진실

△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부족을 경제개발로 메우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68년 5월1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 박 전 대통령. 정부기록사진집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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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 과를 가늠하기 힘든 ‘압축성장’시대
성장 뒷면의 부작용을 무시하는 단선적인 견해 위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갖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집권 18년 동안의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이 많은 편이다. ‘압축성장’으로 요약되는 박정희 시대의 성장은 독재 정치의 짙은 그늘을 희석하는 효과까지 거두며 ‘박정희 향수’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객관적인 성장 실적이 불황을 겪고 있는 지금의 경제 현실과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인 듯하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층은 물론 진보학계 일각에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통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까지 여기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경이적인 성장률은 대통령만의 업적?

적어도 양적인 성장만을 놓고 볼 때 박 전 대통령 집권 동안의 경제 성적은 가히 경이적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636달러로 20배로 불어났다. 수출은 4천만달러에서 150억달러로 급상승했다. 이 기간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9.3%에 이르렀다.
이런 실적은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더라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게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제민 연세대 교수는 <한국 경제 성장사>(서울대 출판부)에 담긴 논문 ‘한국의 산업화와 산업화 정책’에서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이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고, 북한의 예에서 보듯 한국도 최빈국의 하나로 떨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고도 성장은 ‘기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라며 “한국의 성장은 그 율과 기간에서 유례없는 ‘대질주’(great spurt)였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 1차 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였는데, 2% 안팎에 그쳤다고 밝혔다. 또 1차 대전 전야로부터 1·2차 대전, 대공황 등이 끼어 있던 1913~50년까지 주요국 중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 증가율이 가장 높았으나 2%에 미달했다고 한다. 1950년 1인당 국내총생산 8.0% 증가 등 1950~70년대에 고도 성장을 경험한 일본의 경우 1955년까지는 전쟁 이전 수준의 회복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지속 기간에서 한국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 교수는 평가했다.
여기서 늘 논란이 되는 것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적 성과를 오롯이 ‘박정희 개인’의 업적으로 돌리는 게 합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잘해서 경제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지도자의 역량과 국민의 역량을 혼동하는 것”이라며 “국민의 역량과 시대적 요구에 의해 지도자의 역량이 발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흔히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예를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은 필리핀과 달리 우수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는 좋은 바탕을 깔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국제적인 역학 구도로 중동 특수를 누릴 수 있었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는 데 유리했다는 외부 여건을 무시할 수 없다고 김 교수는 진단한다. 따라서 1960, 70년대에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서 박 전 대통령의 공은 제한적이라는 주장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이 시대 상황을 잘 이용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연 10% 안팎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모두 그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고, 집권 초창기 방위비 부담이 크지 않았으며, 1960~80년대에 걸쳐 미국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린 데 따라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다는 객관적인 여건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출 진흥·중화학 육성은 잘했다"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상징인 ‘경제개발계획’이 실상 5·16 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는 점도 박 전 대통령 개인의 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대목이다.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이를 추진할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경제개발계획과 기획원 설립 구상이 2공화국에서 준비돼 있었다곤 해도 박 전 대통령처럼 뚝심 있고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5·16 쿠데타 이전 민주당은 신·구파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만큼 국력을 경제개발에 집중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다. 임 위원은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데 따른 정통성 부족을 경제적 성과로 메우기 위해 경제개발에 매진함으로써 강한 추진력을 발휘했다”며 “(개발독재에 따른 갖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공6 과4’로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 위원은 경제정책의 큰 방향을 수출 진흥으로 잡은 데 대해서도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세계시장이 급속하게 통합되는 때여서 나라 밖의 수요를 적극 활용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해외에서 수출로 승부를 걸게 하고 잘하는 쪽에 지원을 더 해주는 유인체계는 국내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과 비교해 정경유착이나 시장 왜곡의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 방안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비교우위를 보이던 상황에서 수출에 집중한 것은 관련 분야 노동자들한테도 비교적 이로움을 안겨주었다. 당시 전체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60, 70년대에 이룬 경제적 성과의 상당 부분은 박 전 대통령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평가인 셈이다.
이제민 교수도 “박정희 정부가 타깃(목표)으로 삼은 중화학산업이 실제로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나서 집중 육성한 산업이 실제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국제적으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 옛 소련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일본의 경우도 정작 정부 차원에서 육성한 산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은 박정희 시대의 경이적인 양적 성장은 정경유착, 각 부문의 불균형 성장, 관치금융 등 어두운 구석을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60, 70년대의 경제적 성과에서 차지하는 박 전 대통령의 기여도와 함께 또 하나의 커다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양적 성장이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괄목할 만했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을 고려하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독재를 했지만, 그래도 경제는 잘하지 않았느냐’식의 ‘박정희 신화’는 설 땅을 잃게 된다.
문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 총점’을 똑 떨어지게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크기가 확연하게 달리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순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경제 철학과 가치관의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사안이어서 경제 총점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 박정희 정권은 중화공업 육성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통해 60, 70년대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1964년 5월11일 울산 정유공장 준공식장으로 가고 있는 박 전 대통령 일행.


중화학 육성책 '마이너스 결산'이 주는 교훈
다만, 한 가지 실마리로 삼을 수는 있을 법한 연구 결과가 제시돼 있어 흥미를 끈다. 이제민 교수가 몇 군데 학회에서 밝힌 영문 보고서 ‘An Empirical Test of Industrial Targeting: The Case of Korea’가 그것이다.
이 교수는 보고서를 통해 1970~2003년 기간을 대상으로 박정희 정권 경제정책의 근간을 이루는 ‘중화학산업 육성 정책’의 ‘비용-편익’을 계량화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이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게 편익이라면, 국내 자동차산업 보호 정책 탓에 소비자들이 국제가격보다 몇배나 높은 값을 지불한 것은 비용이다. 자동차 업체에 금융·조세 지원을 해준 것도 국민경제에 비용을 준 항목들이다. 이 교수는 이런 비용과 편익을 분석한 끝에 “비용이 편익을 초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렇다고 이를 ‘박정희 모델’의 실패로 곧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연구자와 가정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중화학 육성책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결과를 경제정책 전반의 평가로 갈음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독재는 했지만, 경제는 잘했다’는 식의 단선적인 견해는 적절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증 사례로 삼을 수는 있다.
이 교수의 분석과 달리 ‘박정희식 경제개발’의 총점이 플러스(+)라는 계량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모델이 오늘의 경제 문제를 푸는 유용한 해법이나 대안인 양 여기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 경제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을 뿐 아니라 정부가 자본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할 수 있던 시기의 틀이 지금에 와서도 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겨레21>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장기영 초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오른쪽)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외환은행 개업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내가 졸업을 한 것인지, 제대를 한 것인지…
 
전무후무하게 박정희 시절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던’ 국가 시책들이 있다.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정책들은 다양한 구호와 슬로건으로 방방곡곡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인구 절반 이상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채 공적·사적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해야 했던’ 시절의 정책과 그에 따른 사회 현상을 여덟 가지 열쇳말로 복기해봤다. 편집자
국민교육헌장으로 상징되는 병영같은 학교
박 대통령 아들과 같은 나이여서 더욱 파란만장했다
역대 대통령 공적에 대한 여론조사를 하면 늘 1위를 차지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과 흠모의 대상이 돼온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은 제대로 안 된 모양이다. ‘마음으로만 존경하고 돈은 못 낸다’는 심산인가 보다. 나야 그분을 그다지 존경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을뿐더러 기념관 건립도 찬성하지 않으니 돈을 낼 리 없지만.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오히려 나는 그의 통치 시절 유·소·청년기를 보내면서 불편하고 귀찮았던 기억이 더 많은 편이다. 나는 그분의 아들과 동갑이다. 아니 동갑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학령이었다. 그의 아들과 같은 나이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상급학교를 진급할 적마다 변하는 입시제도의 희생물까지는 아닐지라도 동반 적용 대상이 됐던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병영에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분간이 잘 안 됐던 것 같다.
우선 떠오르는 기억 하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반포됐다면서, 무조건 그걸 외우란다. 다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엄포 속에서. 덧붙여 그분의 아들은 30분 만에 다 외웠다는 비교를 당하면서, 몇몇 아이는 머리 나쁜 놈이라는 난데없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밤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어려운 말들을 외워야 했다. 그 뒤로도 ‘헌장’은 각종 시험의 단골 메뉴가 돼 우리를 지치게 했다. 삼백 몇자나 된다는 ‘헌장’의 나머지는 제대로 암송되지 않지만, 첫머리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구절은 아직도 생생하다. 참으로 우린 대단했다. 날 때부터 그런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었다니. 그럼에도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가 보다. 나이 50이 다 되도록 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 1968년 12월5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그 시절 학교는 병영과 같았다. 정부기록사진집 7권.


기억 둘. 초등학교 6학년 때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합창단을 급조하더니 노래 연습으로 수업도 모조리 폐지했다. 합창단에 못 낀 대부분의 아이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연일 운동장에서 환영 연습을 했다. 역사적 개통식날 대통령께서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간다고 하여 연변으로 몰려나가 깃발을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나는 행여 대통령의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잔뜩 기대했으나 순진한 시골 소년의 꿈은 까만 승용차 몇대가 휑하니 스쳐지나가는 걸로 끝나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탈했다. 뭐하자고 어른들은 우릴 고속도로가로 내몰았을까. 귓가엔 라디오만 틀면 나오는 수많은 유사 ‘경부고속도로가’들의 멜로디만 웅웅거렸다. 그래도 최안순인가 하는 여가수가 부르던 경부고속도로의 노래는 차분한 목소리 때문인지 오래도록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모습은 그로부터 6년 뒤 전혀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만나게 됐다. 역시 고속도로에서다. 고교 친구들 몇명과 어울려 추풍령 휴게소에 놀러갔다가 식당가 근처에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껴 쳐다보니, 문 앞에 새까맣고 다부지게 생긴 차지철 경호실장의 모습이 보였고, 곧이어 한 외국인의 박수소리(웬 박수?)가 들렸다. 식당 문 앞으로 대통령이 나오고 있었다. 그분을 실제로 본 게 뭔 대수라고, 우리들은 경호원들로부터 공연히 험악한 위협만 받았다.
기억 셋. 중학교 시절이다. 퇴비증산운동이라든가 유실수심기운동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한창이었다. 가을도 아닌 봄철에 느닷없이 알밤을 구해 학교로 가져가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밤나무 묘목을 조성한다는 건데, 우리들은 돈을 구해 종묘상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 짓을 하지 않으면 비국민으로 몰릴 분위기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더 괴롭힌 것은 퇴비증산운동이다. 여름이 가까워오면 해마다 산과 들로 나가 풀을 베어와야 했다.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소도시의 까까머리 중학생이 얼마나 낫질을 잘하겠는가. 하루 1인당 할당량이 5kg인가 그랬는데, 낫질이 서툰 나로서는 엄청난 고역이었다. 팔과 다리를 온통 풀에, 낫에 베여가며 우리 몸피보다 더 많은 양의 건초를 장만해야만 귀가가 허락됐다.
기억 넷. 역시 중학생 때다. ‘자유교양대회’란 게 있었다. 고전이나 양서를 정해 모든 학생들이 그걸 읽고 시험을 보고 독후감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서예를 하면 상을 주던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행됐는데, 내가 두각을 나타낸 건 중학교 때였다. 나는 학교 선발로 뽑혀 몇주간 수업도 빠지고 책들만 내리 읽어야 했다. 당시 난 그 지루하고 엄청나게 긴 소설 <로빈슨 크루소>나 <일리아드, 오딧세이> 등을 무려 5번인가 읽었다. 덕분에 시 대회에서 1등을 해서 도 대회까지 나가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5번은 어림도 없었다. 도 대회나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려면 30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지쳐버렸다. 우리는 그걸 ‘강제교양’이라고 불렀다. 그 짓은 고교 시절까지도 이어졌는데, 언제쯤 그 대회가 없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날마다 제식훈련과 총검술
기억 다섯. 고등학교에 올라가니, 학도호국단이란 게 생겼다. 의무적으로 교련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우리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군인이었다. 교장은 연대장이었고, 교사들은 교관이었다. 3개 학급씩 하나의 중대가 됐고, 한 학년은 하나의 대대였다. 전교생은 연대 병력을 이루었고, 덩치 좋고 목청 큰 학생들은 학생 연대장-대대장-중대장으로 뽑혔다. 문약했던 나는 문화부장인지 뭔지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정받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했다. 우리는 3년간 거의 날마다 제식훈련과 총검술을 익혀야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운수 사납게도 난 각개전투 훈련 시범단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차출돼,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위장막을 덮어쓰고 먼지 풀풀 이는 운동장을 박박 기며 필승의 의기를 다져야 했다. 시내 공설운동장에서 시범을 보이며 제법 우쭐하기도 했던 그 일 덕에 그해만은 교련 성적이 좋게 나왔다.
기억 여섯. 대학교에 들어가서다. 여전히 학교는 병영이었다. 대학 교련은 1주일에 4시간씩 필수과목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간신히 길렀던 머리를 박박 밀고 문무대라는 곳으로 군사훈련을 가야 했다. 거부하면 곧바로 학적이 변동돼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의무사항이었다. 그 과정을 마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온 어느 날 고향 친구랑 서울의 시내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훈련 때문에 아주 단발이었으나 친구는 당시 유행대로 장발이었다. 친구가 갑자기 내 옆에서 사라졌다. 그는 파출소 2층으로 끌려가 머리를 잘렸다. 친구는 쥐 뜯어먹은 듯한 머리 모양새를 하고서야 구금에서 풀려났다. 친구가 풀려나던 저녁 6시, 거리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멈추어 선 채 소리 나는 곳을 응시했다.
추억의 앨범을 뒤져보는 것은 행복한 일에 속하리라. 그러나 나는 지금 별로 행복하질 못하다. 저 씁쓸한 기억들 속에서 나의 소년·청년기를 회상하고 싶지는 않다. 허나 어쩌랴. 지워지지 않는 것인데. 60∼70년대의 웃지 못할 풍경들이 내겐 무수히 각인돼 있다.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는 정말 저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김윤태/ 한신대 연구교수·국문학 windor2@hanmail.net


△ 대통령 얼굴 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1965년 4월13일 박 대통령의 완도 및 목포 시찰 당시 주민들과 학생들이 연도에 나서 환영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6권.




주요 사건 당시 박지만과 동갑이던 김윤태씨의 개인사
  •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베트남 파병 결정
    초등학교 시절 맹호부대 노래며 청룡부대 노래를 엄청나게 듣고 신나게 불렀다. 1960년대 말 고종사촌형이 참전하고 돌아와 가져온 여러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고 맛도 보았다. TV수상기를 처음 보았다. 덕분에 가난하던 고모네 살림은 많이 폈고 집도 새로 지었다.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한전 다니던 정씨 아저씨는 술만 취하면 골목 어귀에서부터 “맹호는 간다 간다 간다아~”를 불러제꼈다.
  • 1967년/ 대통령 재선
    선거운동 기간에 나붙은 벽보를 보며 대통령이 왜 기호 1번 ‘후보’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왕이나 종신 총통 정도로 여겨지던 때였다.
  •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수업도 없이 학교만 가면 목이 쉬어라 <경부고속도로가>를 연습, 또 연습했다.
  •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중학교 2학년 때 사회 수업에서 3공화국 헌법을 다 배웠는데, 10월17일 유신이 선포되면서 새 헌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 뒤에 태어난 72년생들의 이름에 ‘유신’이 많다는 보도가 나왔다.
  • 1974년/ 긴급조치 발동·육영수 여사 사망
    고교 1학년 여름방학이라 집에서 우연히 TV로 8·15 경축식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더니 꺼졌다. 몇분 뒤 다시 화면이 나오면서 영부인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다. 그날 저녁 까불고 웃다가 작은형에게 혼났다. 국모가 죽었는데 뭐가 그리 신나느냐며. 슬픔에 젖은 형은 그날 밤 착한 백성답게 육 여사를 추모하는 제법 긴 시를 한편 썼다.
  • 1975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 전격 사형 집행
    집에서 <동아일보>를 구독했기 때문에 동아일보 광고 사태를 목격했다.
  •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피살
    대학 2학년 때다. 고교 시절까지는 ‘역사적 사명을 잘 아는’ 모범생이었으나 대학에 들어와 다른 세상을 배웠다.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쓴 사건도 들었고,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여공이 추락사하는 것도 보았다. 그해 가을 영등포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어느 날 아침 구치소 안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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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임 생체실험 시대!…5호담당제에 버금가는 감시
     
    ‘배꼽수술’ 등 여성의 몸에만 책임을 지운 가족계획
    도회적으로 차려입은 엄마·아빠가 딸·아들 손을 잡고 자랑찬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미래는 화창할 것 같다. 이게 다 애를 둘만 낳은 덕분이다. 대한가족계획협회가 1970년대 내내 뿌린 포스터이다. 포스터와 뗄 수 없는 게 표어다. 1966년부터 대대적으로 벌어진 3·3·35 운동은 “세살 터울 셋만 낳고 35세 단산하자”는 것이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던 기존 표어와 달리 낳을 애들 수도 딱 정해주던 구체적인 것이었다. 1970년대로 넘어가서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내 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런 부모 되자”는 표어로 발전했다.
    실적 채우기에 급급
    일제는 병력 확보 차원에서 “낳아라! 불려라! 길러라!”라는 구호로 다산을 독려했고, 이승만 정권 역시 안보 기반 확충을 위해 다산정책을 유지했으나, 박정희는 단칼에 이를 뒤집었다. 애를 주렁주렁 낳는 게 조국 근대화의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나란히 시작된 가족계획 사업은 대대적인 애낳기 단속이었다. 계몽 방식은 다양했다. 모든 방송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부는 무조건 아이 둘 이하를 둬야 했고, 우표·담뱃값·극장표·통장·주택복권에는 “내일이면 늦으리! 막아보자 인구폭발”이라는 구호가 도배됐다(<20세기 여성사건사> 여성신문사 펴냄). 마을마다 ‘5호 담당제’에 버금가는 감시도 벌어졌다.
    피임 지식 전달과 보급을 위해 리·동별로 배치된 가족계획 지도원들은 “밤에는 좌담회, 낮에는 가정방문”으로 온 동네 남녀의 ‘밤생활’을 간섭했다. 시·군 보건소별로 목표량도 정해져 있었다. 실적 채우기에 급했던 지도원들이 권장한 것은 피임보다는 불임이었다. 남자들이 정관수술을 ‘거세수술’이라며 꺼린 통에 여자들이 주로 ‘배꼽수술’로 불리던 난관수술을 받았다. 피임 방법도 간편한 콘돔 사용에 앞서 자궁 내 부착용 루프 사용을 권장했다. 가족계획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지웠던 셈이다. 지도원들도 대부분 ‘아무개 여사’로 불리던 여성들이었다.
    정신이 서면 부작용 줄어든다?
    성과는 놀라웠다. 1960년대 5명 안팎이던 자녀 수는 70년대 중·후반 2∼3명으로 확 줄었다. 가난한 집 엄마들이 가장 큰 수혜자였으나 동시에 피해자였다. 이들의 몸은 질 낮은 불임수술과 선진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피임약제의 ‘실험장’이 돼야 했다. 허리 통증과 하혈, 구토와 어지럼증이 속출했지만, 당국은 출산 억제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여성들의 안전은 깊이 살피지 않았다. 대신 부작용을 호소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자세’를 거듭 강조했다. “…가족을 조절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되겠다는 정신이 선 다음에 복용한다면 이런 현상(부작용)이 훨씬 적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가정의 벗> 1970년 8월). 1968년에는 마을별로 ‘계몽된 어머니들’ 중심의 가족계획어머니회가 조직됐다. 이들은 피임과 불임의 전도사로 활동하며 ‘자발적 호응’을 유도했다. 실적에 따라 지원 규모를 달리한 결과,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세를 불려 회원 수는 1970년대 말 75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와 권리 개념은 싹부터 잘렸던 셈이다.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출산억제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한다. 구호도 “둘도 많다”로 바뀌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 인구 시계탑을 세워 한반도가 곧 폭발할 것 같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불과 십수년 만에 출산율 저하에 따른 대책 마련에 이제 정부는 물론 온 사회가 분주하다. 계획 없는 가족계획의 후유증이다. <한겨레21>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한-미 우호’의 아랫도리… ‘양공주’들을 민간외교관으로 활용하다
     
    인종차별 갈등 일자 ‘기지촌 정화사업’ 실시
    1971년에는 서울을 불안에 떨게 하는 워싱턴의 성명이 유독 많이 나왔다. 주한미군 수를 줄이고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니었던 기지촌은 매번 뒤흔들렸다. 업주들과 ‘비즈니스 걸’들은 그악스러워졌고 주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설상가상 영내 흑백갈등이 고스란히 영외로 옮겨졌다. 주도권을 백인이 쥐고 있으니 주민들은 백인 입장에서 흑인을 차별했고, 흑인은 백인에게 당한 설움까지 주민에게 분풀이했다. 이런 긴장은 1971년 7월9일 평택 안정리의 캠프 험프리에서 폭발했다.
    안정리 사건, 흑백갈등의 대리전
    50여명의 흑인이 5개 지역 기지촌 클럽에 들어가 업소를 때려부수며 날뛰었다. 흑인 차별에 대한 항의였다. 주민들은 낫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그들을 쫓아냈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흑인들을 기습하기도 했다. 미 군경과 한국 경찰은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며 이들을 진압했다. 그 주말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캠프 험프리 정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10명의 미군과 20명의 한국인이 다친, 당시로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동맹속의 섹스>, 삼인 펴냄).
    1970년대 초반 기지촌은 한-미 동맹이 공고했던 곳이 아니라 극단적 충돌이 내재된 곳이었다. 안정리 사건은 흑백 갈등의 대리전이었다. 미군 당국은 비즈니스 걸들을 인종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실제 백인과 흑인 전용클럽은 나뉘어 있었고 백인 상대 여성과 흑인 상대 여성은 섞이지 않고 위계도 뚜렷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꺼내든 카드는 ‘기지촌 정화사업’이었다. 그는 1971년 12월22일 기지촌 정화정책을 공식화하고 청와대가 직접 챙기도록 지시해, 각 부처 차관급을 중심으로 정화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즈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민군관계 소위원회에서도 인종차별 금지와 성병률 감소가 주요 과제였다. 소위원회는 요구사항을 제시했고, 정화위원회는 집행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미국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꾀했고, 한국은 이미지 개선과 주한미군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데 효과를 거뒀다. 문제는 돈과 인력이 모두 한국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점잖은 SOFA 소위원회에서 클럽 운영방식과 비즈니스 걸들의 접대 방식이 심각한 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권고안도 나왔다. 성실한 호스티스가 손님과 어울릴 때 차별을 삼가도록 훈련하는 것, 흑인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균형 있게 선곡할 것, 인종적으로 공격적이거나 배타적인 간판을 걸지 말 것 등이었다.
    좋은 ‘서비스’에 정부가 발벗고 나서
    대통령이 직접 챙긴 덕에 기지촌은 점점 쾌적한 쾌락의 도시로 바뀌었다. 도로가 확장되고 가로등도 늘고 뒷골목 클럽들은 대로변으로 옮겨졌다. 범죄 단속도 강화됐다. 정화사업이 탄력을 받자, 미국은 성병 문제를 들고 나왔다. 비즈니스 걸들을 등록시켜 정기 검사를 받게 하고 성병에 걸린 이들은 격리하라는, 우리의 현행법과 정면 충돌하는 요구였다. 윤락행위 등 방지법은 성매매를 금지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결국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정기 의료검진과 성병 진료소 시설 개선, 감염 여성 억류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미군 상대 성매매를 ‘잘’ 하기 위한 환경 정비에 정부가 팔 걷고 나선 모양새였다.
    비즈니스 걸들은 민간 외교관으로도 활용됐다. 미군 당국은 공식 문서에서 “(성매매 형태의) 친교는 부대-지역 관계의 핵심에 가깝다”면서 “남성-여성의 친교가 많아질수록 미국인은 한국인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보고하고 있다(미8군 ‘인적요인조사보고서’, 1965). 한국 정부도 미군의 성욕 해소가 한-미 우호를 돈독히 한다고 믿었다. 각 지역에서 비즈니스 걸들의 자치회가 조직됐고, 이들은 시장, 경찰, 보건소장 등이 주최한 교양 모임에 참석해 더 나은 ‘서비스’를 다짐했다. 대통령의 독려 속에 비즈니스 걸들이 한-미 동맹을 다지는 동안 세상은 그들을 ‘양공주’라 손가락질했다. <한겨레21>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내 얼굴이 왜 새까만 줄 아쇼?

    △ 1975년부터 3년간 일간지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

     
    [인터뷰]‘청와대 출입’했던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현재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박 대통령이 여러 과오를 저지르긴 했지만 빈곤 문제를 해결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다.
    그가 기억하는 박 대통령은 매우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 “한번은 기자들에게 ‘내 얼굴이 왜 새까만 줄 아쇼?’라고 묻는 거예요. 다들 ‘모른다’고 했더니 씩 웃으시더군.” 박 대통령의 대답은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의 조카와 출생연도가 같다. 그의 어머니가 큰형수와 같은 시기에 임신을 한 것이다. “박 대통령 대답이 이래요. 어머니가 창피해서 자기를 지우려고 간장을 많이 드셨다고. 그래서 자기 얼굴이 새까맣게 됐대요. 그 얘기를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라구.”
    박 대통령의 소탈한 성격은 그를 비난하던 기자들도 ‘박정희 장학생’으로 변신하게 했다고 한다. “사석에서 박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했던 동료 기자가 청와대를 출입해서 박 대통령과 딱 3번 같이 식사하더니 그냥 박정희 팬이 돼버렸어. 당시 청와대를 거쳐간 기자들 중 나중에 유정회(박 대통령이 유신을 단행한 뒤 직접 임명한 국회의원) 의원이 된 기자가 7∼8명가량 됩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이 친일이나 엽색 논란으로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때는 ‘배꼽 아래 얘기는 하지 말라’는 얘기가 돌 땝니다. 특히 군인 사회에서는 그런 문화가 심했죠. 박 대통령도 그런 문화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지금 잣대로는 평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당시에는 불륜은 문제가 됐지만 ‘로맨스’는 용납되던 때였어요.” “친일 논란도 마찬가지죠. 한-일 합방 이후에 태어난 사람에게 독립운동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겁니다. 물론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크게 대우해줘야 하지만. 박 대통령이 만주군 장교로 가게 된 것도 돈이 없어서 그런 건데, 1943년에 임관해서 45년에 중위가 됐어요. 해방되던 해 비로소 장교가 된 겁니다. 40년 이후에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독립군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왜곡된 겁니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박정희 지시”

    △ 제임스 시노트 신부.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결국 1975년 12월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인터뷰] 제임스 시노트 신부
    제임스 시노트(75·미국) 신부는 1975년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 집행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75년 3월 국제앰네스티 관계자들과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 등 미 의회 인권위원회 관계자들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감시’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JP(김종필씨 애칭)는 앰네스티 관계자 등에게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결코 사형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간 지 8일 만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프레이저 의원 말로는 JP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죠. 당시 JP의 말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박정희밖에 없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구명을 위해 박 정권에 대항하다 75년 12월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1960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정치적 혼란이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에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환영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인 신부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박정희가 3선 개헌을 강행하자 그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는다면 민주화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군사정권이 장기 집권했던 칠레나 브라질은 지금 과거사 청산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 왜 한국은 아직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나요?”

    박정희와 정인숙, 그리고 정일권

    △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관련해 당시 신문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그는 “정일권 총리가 누명을 뒤집어쓴 대가로 복권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인터뷰]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박정희의 여자관계가 거론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정인숙 사건이다. 정씨는 1970년 자신의 오빠에게 피살됐는데(당시 정씨는 26살이었다), 그의 ‘연인’이 정일권(1994년 사망) 총리였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됐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도 많다.
    김자동 ‘민족일보사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정인숙의 연인이 정 총리였다는 것을 당시 박 대통령 측근들이 퍼뜨리고 다녔다”며 “나도 당시 박정희의 한 측근으로부터 그 얘기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위원장은 “정 총리는 당시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난 상태였는데, 정인숙 사건을 계기로 다시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됐다”며 “세간에는 정 총리가 누명을 뒤집어쓰는 대가로 복권됐다는 얘기도 돌았다”고 말했다.
    당시 정인숙의 아이는 박 정권과 유착관계에 있던 한 일본인 재력가에게 잠시 맡겨졌다가 외가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정인숙의 수첩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정씨의 오빠는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뒤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임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유신은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 국회 출입기자·정치부장)
    [인터뷰]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박정희 집권 시절 <조선일보> 정치부 국회출입 기자와 정치부장을 했다. 최 전 대표는 1월26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시대에 대해 “가난 탈출 과정은 경이로웠지만, 유신은 절대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박정희가 내걸었던 국가 재건은 지식인이나 언론인 사이에서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박정희에 대해 기자들의 평가는 어땠나.
    우리는 참담한 가난의 기억을 가진 세대 아니냐. 인권 탄압한 것도 사실이고 쿠데타로 집권한 것도 사실이다. 정치나 관료 세계가 부패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이션 빌딩(국가 건설)의 시대였다. 왜 민주주의 제대로 하지 않나 하는 것보다는 가난 탈출 과정을 놀라운 눈으로 보는 시각이 훨씬 강했다.
    개인적으로 본 박정희는.
    집념이 대단해 보였다. 경부고속도로 절개면까지 직접 그린 사람이다. 밤잠도 안 자는 것 같았다. 경부고속도로 놓는다고 할 때 찬성자는 대한민국에서 딱 둘뿐이었다. 박정희하고 정주영. 장기영 부총리를 위시해서 온 국민이 반대했다. 당장 굶어죽는 사람이 천지인데 자가용 가진 사람 유람길 닦나 이랬다. DJ가 국회에서 4시간 동안 반대 연설을 했는데 명연설이었다. 결국 여당 의원들이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고속도로 밀어붙여 닦고 새마을운동 시작하더니 그 다음 단계로 공단, 항만 세우면서 사회간접자본(SOC)에 투자하더라. 일본에서 종자돈 얻어다 포철 세우고 길 닦고, 차관으로 공장 세워 온갖 물건 내다팔고, 경공업·중화학공업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은 경이로웠다. 그때부터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통치 방식을 평가하자면.
    생각을 많이 하고 나라를 어떻게 하면 바꿀까 혼신을 쏟아붙는 스타일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술하고 여자. 육 여사가 재떨이 던졌다는 얘기는 파다했다. 뒷세대 눈에는 괴물이나 독재자로 그려지겠지만 국가 발전 과정에는 그때만의 상황이 있다는 걸 그때의 시각으로도 봐야 균형이 잡힌다. 그런데 삼선개헌까지는 그렇다 쳐도, 유신은 그거 나라 조지는 거였다. 안 했어야 했다. 좋게 보면 내이션 빌딩 완수하려고 그랬겠지만 다르게 보면 독재자의 길로 스스로 둥둥 떠서 간 거라고 볼수 있다.
    정치 환경은.
    그 시절에 부패는 없었다고 하지만 흥청망청했던 건 맞다. 어느 정도였냐면 유력 정치인이 내게 친구들이랑 술 먹으라고 촌지 수표를 줬는데 엄청난 거액이었다. 그래서 이 양반이 잘못 준 건가 해서 다음날 돌려주러 갔더니, 지갑에서 그런 큰돈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고 있더라. 정치인들 돈 펑펑 쓰고 계보 만들고 그랬다.
    10·26 사건 때는 어땠나.
    죽을 사람 죽었다는 생각은 솔직히 없었다. 남북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박정희 혼자 원맨쇼 하면서 끌고 간 나라였는데 걱정이었다. 전두환이 국보위 만들어 나라 들어먹은 게 큰 굴절이었다. 10·26 직후 정부가 관리를 잘해서 민주주의 선거를 했어야 했다. 그걸 막아버린 게 국보위였다. 정말 큰 굴절이었다. <한겨레21>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출처 : 기살림연구소
    글쓴이 : 곽내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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